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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lin 2008 : 대성중학교 (大成中學敎), 명동촌 (明東村) 본문

Footprint in the World/2008 PVG&YNJ.CN

Jilin 2008 : 대성중학교 (大成中學敎), 명동촌 (明東村)

Trippe_Park 2014.10.28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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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의 화소문제로 화질이 고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 숙소 (장백산 대하호텔) 창문으로 이도백하진 (二道白河) 거리를 내려다 보는데, 전망이 별로인지 잿빛 건물만 보여서 돌아서는 순간,

조그만한 거리에서 태극권 (太極拳) 을 수련하시는 동네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상당히 이른 시간인데, 모두들 부지런 하시더군요.)




숙소에서 짐을 챙겨 오늘의 첫번째 일정으로 용정시에 (龍井市) 위치하고 있는 용정중학교에 (龍井中學敎) 도착했습니다.

제가 도착했을때 막 체육시간이 시작되었는지, 한학급 정도 되는 학생들이 체조대형으로 일사불란하게 (?) 움직이는 모습을보니 어릴적 생각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더군요.




용정중학교는 본래 대성중학교 (大成中學敎)라는 이름이었으며, 저항시인 윤동주 (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일 2월 16일)의 모교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기록에는 은진중학교를 (恩眞中學校) 다니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성중학교가 (현재 용정중학교) 모교라고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용정시에는 광명, 명신여자, 영신, 동흥. 은진, 대성중학교가 있었는데, 이들 6개의 학교가 대성중학교로 통합되었고 현재의 용정중학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용정중학교 한켠에는 대성중학교의 옛 교사가 (校舍) 그대로 남아있으며, 현재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옛 대성중학교 교사 입구에는 이렇게 윤동주 시비가 (尹東柱詩碑) 세워져 있는데, 학창시절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서시가 (序詩) 새겨져 있더군요. 오랫만에 한번 떠올려 볼까요?


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復原記 (복원기)


이 建物 (건물)은 1921년 大成中學 (대성중학)으로 建立 (건립)된 學舍 (학사)로, 우수한 人材 (인재)를 많이 길러 낸 朝鮮民族敎育 (조선민족교육)의 瑤籃 (요람)이었다.

오랜세월을 지나는 동안 建物 (건물)이 크게 훼손되어 붕괴 될 위험이 있어, 이에 본교에서는 龍井市政府 (용정시정부),

韓國 (한국)의 社團法人 (사단법인) 海外韓民族硏究所 (해외한민족연구소) 주선으로 株式會社 (주식회사) 金星出版社 (금성출판사) 耘平 金洛駿 會長 (운평 김낙준 회장)의

支援 (지원)을 받아 옛 學舍 (학사) 모습 그대로 復原 (복원) 하였다.


1994년 6월 15일

용정중학



대성중학교의 옛건물을 들어서면, 2층에 역사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어서 일제강점기 당시 대성중학교의 설립배경, 사명, 졸업생, 윤동주 시인에 대한 사료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문화부에서 사전에 요청하여, 지용권관장님께서 특별히 직접 전시된 사료를 하나씩 설명해주시고, 만주에서의 항일운동과 관련된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덕분에 국어책으로만 접했던 윤동주 시인의 이미지가 조금 더 입체적이고,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시간 만들어주신 관장님 감사합니다. ^^)



민족교육운동은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 학교가 생겨야 했던 당위성에 대한 사료들을 알기 쉬운 설명과 함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민족교육운동의 결과로 건립된 연변지역의 민족학교 (명동학교, 정동학교, 창동학교, 광성학교, 대성중학교 등)에 대한 사진자료들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용정중학교가 되기까지의 역사 자료도 함께 확인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항시인 윤동주의 삶과 발자취에 대해서도 별도로 사료를 전시해두었는데요.

어쩌면 '윤동주 시인이 지금의 용정중학교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동주 (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일 2월 16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 용정에서 출생,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는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 북한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그가 남긴 작품은 '새 명동', '서시 (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유고시집)',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가 있다.

- 위키백과 (바로가기)




학교를 나서려는 순간, 또 다른 윤동주 시인의 후배님들은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부디 대 선배처럼 훌륭한 인재가 되기를.... (그런데 수업하는 모습이 어째 제식훈련.... -_-;)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다는 명동촌 (明東村) 이었습니다. 사실 표지판도 없으면, 여기가 어디인지 알수도 없을만큼 아주 한적한 시골마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윤동주 시인이 유년기를 보냈던 생가입니다.

만약 일제강점기만 아니였다면, 윤동주 시인의 작품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지 사뭇 궁금해지더군요.



KBS 1박 2일 촬영차 이곳에 왔던 강호동씨가 씨름을 했던 그 씨름장도 볼 수 있었는데, 저희 일행중에 씨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어서 다들 그냥 지나치더군요.



기와지붕사이에 뿌리내린 잡초가 이곳의 지나간 세월을 말해주는 듯 했습니다. (너무 많이 자라기 전에 뽑아주어야 할텐데...)

(2012년쯤에 한번 더 복원이 되어 지금은 잘 꾸며져 있다고 합니다.)




생가에는 윤동주 시인과 그의 가족들이 사용 했을법 한 살림살이들이 놓여져 있었는데, 물건들의 상태로 봐서는 대부분 새로 가져다 둔것이 아닌가 생각되더군요.



방에 들어서면 이렇게 추모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방명록에 서명을 할 수 도 있습니다.

생가가 아무 탈 없이 계속 잘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작은 성의를 보태보았습니다.



한쪽편에는 이 생가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살펴 볼 수 있는 비석도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통일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는 (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 청소당번을,

독립운동가 이자 윤동주 시인의 고종사촌형이였던 송몽규님은 (宋夢奎, 1917년 9월 28일 ~ 1945년 3월 7일) 떠든다고 반장에게 걸린 모양이고,

윤동주 시인의 동기로 추정되는 김옥분여사는 구구단 못 외웠다고 흑판에 이름이 적혔습니다. 거기다 윤동주 시인은 지각까지 하셨네요!

세월이 흘러 이제는 거의 백년전의 모습일텐데, 이분들은 아직도 이곳에서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 합니다.



햇볕보다 더 뜨거웠던 열정으로 수놓던 그 여름날의 추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라는 듯 코스모스가 살랑바람에 나부끼네요.

개인적으로 2008년 그 여름날 특별했던 우리들만의 이야기들은 죽을 날까지 잊지 못할것 같습니다.



1909년 설립된 명동교회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이며,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고 합니다.

나무 장대에 매달린 십자가의 모습이 이곳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 하는데요. 일반 가옥같이 생긴 모습이 조금 의외였습니다.

알고보니 8개의 방이 딸린 일반 가옥의 벽을 헐어내고 세웠기 때문이고, 많을땐 이곳에 천명이 넘는 분들이 모였다고 하네요.



현재는 개보수가 되어, 교회의 모습을 다시 되찾았다고 하는데 제가 다녀왔을때는 교회라고 하기엔 너무 엉성했습니다.

특히 대충대충 만들어진 전시물들은 '정말 너무하는것 아닌가?'라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자비를 보태고, 성금을 보내고 있기에 이만큼이라도 보존이 되는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는 이것 조차 다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2012년에 시설이나 집기가 더 확충되었고, 문제가 생긴곳은 개보수가 되었다고 하니, 제 작은 성의가 보태진것만 같아서 뿌듯한 마음입니다.)


다음 포스팅은 잠깐 용정시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곧 올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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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padmasambhava.tistory.com BlogIcon 생명마루한의원 2014.10.28 11:31 신고 잘 보고 가요~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thebluesky.info BlogIcon Trippe_Park 2014.10.28 15:39 신고 감사합니다~ 좋은하루보네세요 ~^^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hosii.info BlogIcon 반쪽날개 2014.10.28 21:22 신고 저런건 국가차원에서 지원이 되야하는데, 지금의 만주는 중국영토인 탓에 그렇지 못하다는게 안타깝기만 하다.
    일제 강점기때 일제에 의해 만주땅이 강제로 중국에 넘어가버렸는데, 암튼 이래저래 도움 안되는 것들이여=_=

    요즘도 학교 정규 수업 중에 문학이라는 과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교다니던 시절, 일제 강점기 때 지은 시가 뭐 이리 많냐 하면서 불평(....순전 외우기 싫어서=_=;;; ) 했었지만,
    이후 모종의 일(?)로 인해 국사에 대해 좀 더 심화적으로 공부하다보니,
    그분들의 활동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문학은 1900년도 초반에 막을 내렸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해방 직전, 태평양전쟁 때는 민족 말살정책 때문에 정말로 문학작품이 하나도 없지만...

    어쨌거나 좋은 경험 하고왔구만~ 부럽수~.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thebluesky.info BlogIcon Trippe_Park 2014.10.29 01:01 신고 그래도 다행인건 내가 다녀오고 4년쯤 지나서 다시한번 개보수가 되었데, 지금은 정말 말끔하다고 하던데?
    다만 국가차원에서 정기적으로 지원을 해준다면, 더 오랜시간 그자리에 있을 수 있을텐데 그게 참 아쉽지...

    요즘 고등학교 수업과정이 거의 선택형이라서 듣는 학생들만 알겠지만, 나름 시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재미가 쏠쏠했었지.
    특히 윤동주 시인이랑 이육사 시인의 시들은 그런 경향이 많았고..
    그분들 아니였으면, 과연 우리가 한글로 말할 수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부러우면 짐싸들고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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